공중그네, 오쿠다 히데오(2004) 다시 본 이야기

기분 좋게 봤던 '한밤중의 행진'의 작가다. 이 작가의 글은 간결한 호흡으로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 특히나 이 책은 5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더 빨리,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대략 세시간이 채 안되어 마지막 장까지 글자를 빨아들였으니. 

이라부라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독특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등장한다. 기벽에 가까운 그의 독특한 치료법(?)들은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나를 끊임없이 피식거리게 만들었다. 애정이 가는 캐릭터다. 이 의사를 중심으로 정신과적 치료를 요하는 다섯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선단 공포증이 있는 야쿠자, 점프를 하지 못하는, 하지만 자신이 점프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공중 곡예사, 1루 송구를 하지 못하게 된 프로 3루수, 장인의 가발을 벗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의사, 그리고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다양한 증상으로 등장하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심한 강박에 휩싸여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그들의 직업과 환경이 뒤틀어 놓은 노이로제, 질투 혹은 이기가 숨어 있다. 이라부의 치료법은 매우 단순하다. 각각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에는 '내려 놓으라'고 그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본인이 무당이나 신이라도 되는 듯, 서로 다른 다섯 명의 직업에 대한 신비한 통찰력을 보인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 방법을 터득하고, 방법이 쌓이면 커리어가 된다. 그런데 종종, 오히려 그 커리어 때문에 발목을 잡히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조금만 내려 놓으면, '워너비'와 '워너비룩' 사이의 밸런스를 조금만 잘 맞출 수 있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라부의 통찰력은 그 스스로가 그 기준을 잘 알고, 그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 묘하게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조금은 놓을 수 있게 도와준 책이었다. 지겨운 강박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라부라는 비현실적인 정신과 의사가 날 치료해준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내가 쓰는 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 책이다. 좋은 글은, 표현이나 미사여구가 아니라,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라는 주제라는 걸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강원도 #20 151101_강원도

#20

 

, 에취! 훌쩍, 캬아악, .

 

화장실이 좁아 퉤, 하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 온다. 코에 잔뜩 들은 콧물을 목으로 끌어내려 변기에 뱉는다. 아침부터 코가 말썽이다. 비염이 도진 것 같다. 처음엔 환절기에만 가끔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만성이 되어 버려 조금만 온도 차가 나도 금세 코를 훌쩍이게 됐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집을 나온 후 며칠이 지나가는데, 지난 며칠 동안은 전혀 증세가 없었으니 말이다. 화장지를 돌돌 말아 팽, 하고 코를 푼다. 변기에 화장지를 버리고 물을 내린다. 누런색 오줌물이 화장지를 빨아들이며 소용돌이 친다. 다시 코를 끌어모아 퉤, 하고 소용돌이 가운데에 뱉어 버린다. 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잔뜩 부어 있다. 누가 보면 밤새 생이별이라도 한 줄 알겠다. 에이, 그냥 선그라스를 살 걸 그랬어. 세면대 물을 틀어 얼굴을 닦아낸다. 찬물로 눈을 좀 식히고 싶었지만 물이 미지근하다. 다시 휴지를 뜯어 물을 닦아내며 목에 남은 흐릿한 자국을 흘낏거린다.

 

까페 앞에 나와 담배를 물고 선다.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가요가 재생된다. 오늘 밤 암 쏘 핫,   너무 뜨거워. 헤이 미스터, 헤이 시스터 저리 비켜줘. 뜨거,뜨거, 난 너무 뜨거워. 가슴 큰 지나의 노래네. 그런데 베이스를 어떻게 맞춰 놓은 건지 듣기 싫은 치찰음만 강조되어 들린다하이만 너무 크잖아. 이큐를 뭐 이렇게 맞춰 놨어. 듣기도 싫은 걸. 소리의 자리에서 한 걸음 비껴서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부은 눈두덩이가 무겁게 느껴진다. 해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 대기가 뜨거워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담배 연기가 입안의 수분을 전부 빨아들여 목이 탄다. 까페 안을 살피니 내 테이블 위에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다. 손가락으로 튕겨 담뱃불을 끄고 안에 들어가 앉는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다 결국 흘리고 만다. 커피가 목을 타고 흘러 옷으로 번진다.

 

카운터 앞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던 여주인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급하게 휴지를 챙겨다 준다. 사레가 심하게 들려 콜록거리는 나를 걱정하는 말을 건넨다. 기침을 몇 번 하니 눈이 빠질 것 같다. 혈압이 오르는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심호흡을 하며 초점 없는 눈으로 여주인의 입모양을 응시한다. 심장이 머리까지 올라왔는지, 박동 소리에 맞춰 뒤통수가 두근거린다. 시선이 흐릿해지고, 지나의 노래는 희끄무레 번져 리벌브 먹인 소리가 되어 머리 속에서 울린다. 지나의 큼지막한 가슴이 덜렁거린다.

 

"괜찮으세요?"

 

퍼뜩 정신이 든다. 눈이 풀렸었나 보다. 여주인이 허리를 굽혀 내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고 있다. , , , 괜찮아요, 당황 섞인 대답을 던지고 커피를 마저 닦아낸다. 코가 미지근하다 싶더니, 커피를 닦아낸 자리에 벌건 핏방울이 떨어져 스며든다.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어머, 어떡해, 여주인이 카운터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 내민다. , 괜찮아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웃으며 코피를 닦아낸다. 표정이 굳어졌지만 별일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대충 닦아내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휴지에 물을 적셔 코와 입 주위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낸다. 코에 박아 뒀던 휴지를 빼내니 시커먼 핏덩이가 휴지 끝에 딸려 나온다. 킁 하고 코를 푸는데 다시 코피가 터진다. 온갖 욕지기를 내뱉으며 한참동안 그렇게 화장실에서 지혈을 한다.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세수를 했는데도 여전히 찝찝하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여주인에게 괜찮다는 인사를 건네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또 일장 연설을 늘어 놓을까 싶어 바로 헤드폰을 쓰려 했는데, 타이밍이 좀 늦었다. 여자는 어느 새 앞자리에 앉아 말을 걸기 시작한다.

 

"오늘 안색이 너무 창백해 보여요.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얼굴도 좀 부은 것 같고, 코피까지 흘리시고."

 

"... 아뇨, 오늘 비염이 좀 심하게 왔네요. 가끔 심한 날에 코피도 나고 그래요. 괜찮아요."


비염 핑계를 댄다. 사실은 내심 좀 걱정이 된다.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힌 게 뭐가 좀 잘못된 건지, 아침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더니 코피까지 난 거다. 젠장맞을 싸구려 허리띠 같으니.

 

"... 많이 안좋으시면 약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비상약 통이 저기 있을 거에요."

 

"아니에요. 원래 편두통이 좀 있어서 진통제 가지고 다녀요. 그냥 찬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가방에서 약통을 꺼내 타이레놀과 코감기약을 한꺼번에 삼킨다. 이제 좀 나아지겠지. 물잔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 젖혀 기댄 채 눈을 감고 비트를 듣는다. 강렬한 첫째, 심오한 둘째를 거쳐 사랑스런 3번째 곡의 후반부로 넘어갈 즈음, 잠이 오기 시작한다. 오래 쓴 싸구려 이어폰의 접촉이 불안정해 간헐적으로 소리가 끊기듯, 뜨문뜨문 현실과 꿈을 오간다. 까페에서 잠을 자는 게 민폐 아닌가. 괜찮아. 손님도 없는데 뭐. 술을 또 그렇게 마셔댔고, 잠도 거의 못 잤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합리화한다. 가만. 그건 내 사정이잖아. 에이. 근데 이미 타이밍 지났어. 그냥 자야지. 작게나마 가지고 있던 불안감을 떨치고 나니 왔다갔다 하던 소리가 완전히 꺼진다


희뿌연 배경에 지나의 커다란 가슴이 덜렁거리며 떠 다닌다. 꿈이니까 만져도 된다고 생각하며 손을 길게 뻗는다. 닿지 않는다. 약간 모자르다. 고개가 의자 목받이 뒤로 넘어가 버려서 아무리 용을 써도 바로 서지 않는다. 어깨를 돌려 한 손이라도 닿게 하려 한다. 저 풍만한 가슴을 꼭 만져보고 싶다. 꿈이니까 어깨가 좀 빠져도 상관 없을 것 같다. 무리해서 어깨를 우드득 돌려버린다. 물컹. 큰 가슴, 폭력적인 가슴이 손에 잡힌다. 내 큰 손바닥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아 손가락 사이로 넘쳐 흐른다. 그리고 부드럽다. 한없이 부드럽다. 우유에 적신 카스테라가 이런 느낌일까. 어우. 갑자기 들이닥친 자극에 놀라 팔을 움츠렸다가 다시 손을 뻗어 유선형의 더블유 사이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피부가 매끈하다. 오른쪽 가슴을 한 번 세게 움켜 쥐었다가, 곧 손가락에 힘을 빼고 손 끝으로 젖꼭지 주위를 간질인다. 손가락을 모아 젖꼭지를 살짝 꼬집는다. 토르소 뿐인 가슴이 움찔하는게 느껴진다가슴이 크게 출렁이며 파도를 만들고, 파도는 목 위로 울컥거리며 뻗어나가 쇄골과 목, 머리의 형상을 만든다. 선이 먼저 그려지고, 색이 더해진다. 음영이 더해지며 굴곡을 만든다. 갑자기 준모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돌리라고? 아니 새끼야. 처음에는 살살. 완급조절을 하라고. 약하게, 슬쩍 슬쩍, 그러다 강하게. 봐봐. 손을뻗어 막 나타난 목덜미 주위를 더듬는다. 올려묶은 머리 아래, 목 뒤의 잔털이 잔망스럽다피부에 닿지 않게, 허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살짝, 그러나 지그시 쓰다듬는다. 턱까지 닭살이 돋아 오르는 게 보인다. 목젖까지 내려온 손가락을 세워 쇄골을 간질이다가 뱅글뱅글 돌리는,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 아래로 점점 내려간다. 비옥한 풍요의 골짜기를 거쳐 다시 유선형의 더블유 사이까지 내려온다. 왼쪽으로 갈 듯, 오른쪽으로 갈 듯, 손가락이 좌우로 방향을 가리킨다. 무심한 듯, 실수인 듯, 손목께를 젖꼭지에 슬며시 부딪힌다. 움직임이 순간 패턴을 깨며 오른쪽 가슴을 덮친다. 하지만 쉽게 중심으로 향하진 않는다. 손가락은 젖꼭지를 둘러싼 선홍빛의 유륜 주위를 한참 동안 맴돈다. 배가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는다. 갓 생겨난 머리에 숨통이 트인 듯, 하악거리는 숨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젖꼭지를 스치며 재빨리, 이번엔 왼쪽 젖꼭지를 꼬집는다허리가 활처럼 휜다. 다시 한 번 가슴이 출렁이고, 이번에는 아래쪽으로 파도가 흐른다. 허리와 골반이 나타나고, 검은숲을 지나 쭉 뻗은 양 다리가 그려진다. 골반 뼈를 쓰다듬던 두 손을 뻗어 엉덩이를 급하게 움켜쥔다. 다시 한 번 허리가 휜다. 그 허리를 재빨리 낚아채 거칠게 내 무릎 위로 앉힌다. 꼿꼿이 선 내 위로 아늑한 다리가 부드럽게 벌어져 포개진다. 강렬한 자극에 이번엔 내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지그시 눈을 감고 삽입감을 만끽한다. 팔에 힘을 줘 천천히 허리를 돌린다. 내게 얹힌 몸은 움찔거리며 적극적으로 쾌감을 표현한다. 인위적이지 않은 그 움직임이 마음에 든다. 내 인도에 따라 흐르던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그 몸은 움직임을 멈춘 채 긴 숨을 내쉬며 호흡을 조절한다. 그리곤 이내 스스로의 의지로 격한 요분질을 시작한다. 짜릿한 쾌감이 세포 끝에서부터 시작된다. 애태웠던 전희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듯, 그 움직임은 일정한 패턴을 그리는가 싶다가 순간 허를 찌른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색다른 자극이 척추를 타고 쌓이는 느낌이다. 애태우기를 포기한 허리놀림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이내 그 자극은 뒤통수까지 차 올라 목뼈 끝, 제비초리 바로 및 움푹한 부분에까지 와 닿는다. 순간 머리가 쨍 하고 얼어붙는다. 통증이 부딪혀 주위 장기들로 번져나간다. 하지만 아직 척추에 남은 그 쾌감의 물결을 포기할 순 없다. 뒤통수를 넘어서면 고통이 일어 달콤한 그 자극이 영영 사라질까 무섭다. 템포를 좀 늦춰 오랫동안 즐기고 싶지만, 쾌감에 미친 이 몸뚱아리는미친 듯이 달릴 줄만 안다. 살이 쓸리고 허리에 고통이 인다. 아썅. 부러지겠다고. 허리를 잡아 세우려 손을 대는데, 손을 대는 지점부터 무채색으로 사그러들기 시작한다. 터질 듯 생기롭던 탄탄한 피부도 탄력을 잃고 쭈글쭈글 미농지처럼 아스라진다. 나를 꽉 물고 흔들던 긴장이 사라진다. 이제 선만 남은 그 몸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만, 더 이상 마찰이일지 않는다. 색이 옅어지며 조금씩 모래처럼 이리저리 흩날려 사라진다.

 

익숙한 패턴의 꿈이다


160402. 일상

날짜란게 참 묘하다.

아침에 알림이 떠 봤더니 안녕하우스의 생일이란다. 작년 오늘, 기대감과 두려움을 안고 난이와 함께 다낭행 비행기에 올랐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가능성 하나만을 보고 시작했다. 비지니스 인프라가 매우! 열악한 다낭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하나하나 체화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돌이켜 보니 참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감정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었고, 완벽하게 고립된 특수한 상황에서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새벽부터 밤까지 정신없이 양쪽을 오간다.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불면이 나태함의 증거는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하루가 할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위가 아래고 아래가 위인 이 나라에서의 1년간은 내게 나름의 깜냥을 가지게 해 주었다. 고질적인 베트남 사람들의 성향에도 익숙해졌고, 외국인 프리미엄을 어디까지 감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도 잡혔다. 다행이 1년 전보다는 원활하게 준비가 되어 가고 있다.

으어. 근데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게 된 이후 마음이 이상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살아남았다는 감격인지, 별것도 아닌 거에 의미나 부여해서 지지리 궁상을 떠는 건지. 괜히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앞이 아득해진다. 요 몇 주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주말을 핑계로 하루 째고 호이안이나 다녀오려 했는데, 아 젠장할 오늘만큼은 도저히 쉴 수가 없겠다.

으아아아아 진짜. 날짜라는게 참 묘하다.


강원도 #19 151101_강원도

#19

 

, 하고 목덜미에 충격이 느껴진다.이제 이렇게 끝나는 거겠지. 드디어 자유로워 질 수 있겠지. 방을 넣어준 아줌마에겐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더럽진 않을 테니, 구조대원들이 치우고 나면 바로 방 받을 수 있을 거에요그런데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가죽이 조금씩 조여들며 목을 더 압박하지만, 아직 의식은 멀쩡하고 방 안의 상황이 명료하게 보인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벌인 술판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맥주병은 비워져 제 멋대로 뒹굴고 있고, 냉동 닭강정은 벌어진 뱃속에 젓가락을 꽂고 있다. 봉지 안에 몇개 남은 게 없어 의아하다. 술에 취해서 또 막 집어 먹었나 보다. 창문쪽을 보고 매달릴걸, 불이 켜지는 걸 보면서 불을 끌 수 있었을 텐데노트북으로 만들어 놓은 비트를 틀어 놓을 걸, 그럼 나중에 누가 보면 멋있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얼마나 더 있어야 괴로울려나 살짝 겁도 난다. 몸에 힘을 빼고 팔다리를 늘어뜨린다. 지이익, 가죽이 목을 더 심하게 조인다. -. 하고 숨을 뱉는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나 보다. 폐 속에 가뒀던 숨이 빠져나가고 다시 들이킬 순서다. 하지만 조여든 가죽이 턱 밑을 심하게 눌러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 ,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난다. 괴롭다. 아주 잠깐 후회한다. 방 안의 닭강정 봉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데, 형상이 점점 뿌얘진다. 눈물이 나는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손발을 버둥거려 보지만 곧 눈 앞이 캄캄해 진다.

 

화면이 꺼진다. 온통 암흑 뿐인 사방에 간헐적으로 빛이 비친다. 빛은 의식이 멀어질 쯤이면 확 하고 순간 켜졌다가 일순간에 사라진다. 경고등이 켜지듯, 노란색, 빨간 색흰색의 세 가지 빛이 반복해 점멸한다. 저 밑에 야구장에선 깡, , , 하는 배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래. 빛의 점멸은 이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둔탁한 쇳소리는 점점 커지고, 빛의 군무는 점점 바닥으로 깔려 자리를 잡는다. 쇳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현의 떨림이 느껴진다. 사람이 지나가면 발목이 잘리는 날카로운 쇠 줄이다. 작은 소리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기타보다 가늘고 유연한 시타 소리가 들린다.현은 끝을 모르게 길게 늘어졌다, , 하는 소리에 급히 움츠러든다. 그 떨림이 완급을 조절하며 높낮이를 달리 한다. 아마, 솔이나 솔 샵 정도의 음일 거다. 현이 움츠러들면 순식간에 몇 옥타브를 뛰어 오르지만 결국엔 같은 음이다. 음과 음 사이에 굵은 현악기 소리가 침투해 슬픈 곡조를 연주한다. 바닥에 뱀처럼 깔려 있던 노란 빛의 몸뚱아리는 드럼이 된 쇳소리에 맞춰 꿈틀댄다. 아니다. 소리에 빛이 반응하는 게 아니다. 거대한 불꽃놀이를 멀리서 볼 때처럼 빛이 먼저 번지고 소리가 따라온다. 이제는 빛이 소리를 이끌고 있다.

 

멜로디는 엉키고 흩뿌려져 오케스트라를 이룬다. 어릴 때 우유 광고에서 보던 왕관 모양의 우유방울이 희고 흰 사분면 위에 흩어진다. 방울은 면에 닿으며 청명한 소리를 낸다. 현은 채찍처럼 면을 때리며 길고 가늘은 떨림을 낸다. 하나 둘씩 쏟아지기 시작한 방울은 어느 새 강물이 되고, 강물 위는 크고 작은 왕관들이 빼곡하게 들어선다. 흰색 강 위에 스콜이 거칠게 내린다강 건너에는 몇 명의 낚시꾼들이 우산도 없이 서서 릴을 던진다. 도로로로록. , 으이쌰. 지이이이이익. 첨벙. 그들이 내는 소리가 음악에 더해진다. 갑자기 한 명의 낚시꾼이 대어를 놓친 듯, 욕지거리를 뱉으며 온 힘을 다해 낚싯대를 물 위에 내려친다. 낚싯대는 채찍처럼 휘어졌다가 쏜살같이 펴지며 날카롭게 강물을 파고든다. 가늘은 낚싯대가 만든 파도는 꿀럭거리며 몸집을 불려 달려오고급기야 굉음을 내며 강 위에 흩어져 있는 왕관들을 삼킨다. 고조되는 멜로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화음이 반복된다. 파도는 강 한가운데에서 휘몰아치며 회오리가 된다. 거대해진 토네이도는 주변의 강물을 전부 빨아들이고, 강 둑을 넘어 집과 차들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멈칫거리는 사이 내앞에까지 달려온 회오리가, 아차 하는 사이에 날 삼킨다. 그안에, 내가 땅에 버리고 왔던 모든 것들이 있다


삼성 노트북, 반쯤 남은 소주병, 준호가 준 오디오테크니카 헤드폰, 지브라 패턴의 러그, 준모의 씨디먹돌이가 죽은 개집, 아이폰 3gs, 낡은 검정색 구두, 아빠의 화물차, 조카에게 선물한 RC, 왼손잡이용 미즈노 글러브,명옥이의 치아 미백 테이프, 부러진 야구 배트, 세탁소 옷걸이, 멍청이 똥고양이 황금이와 금실이, 백부장의 안경, 사무실 기름걸레, 고시원 주방의 라면, 은숙이의 편지, 성 체육관 스티커, 6번 줄이 끊어진 기타, 매경 테스트 문제집, 동방에서 도둑맞은 베링거 믹서, 삼척 건달 아저씨의 잠든 뒤통수까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오리 속에 나는 조각나 파편이 되어 떠 다닌다. 온갖 것들이 부딪혀 발가벗은 내 온 몸에 생채기를 낸다. 멍청한 금실이는 온몸에 털을 추켜 세우고 손을 뻗어 내 목을 조른다. 몸에 붙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떨쳐내려 악다구니를 쓴다. 소리를 지르려 하지만 봉인된 목에선 쇳소리가 난다. 회오리는 끝끝내 그 모든 것들을 내게 닿게 해 시뻘건 피가 온 몸에서 배어 나온다. 죽을 힘을 다해 회오리의 정상으로 기어오른다.

 

맨 꼭대기에 올라 난간 너머로 발을 늘어뜨리고 앉는다. 정상에 오르니 귀를 찢을 듯 휘몰아 치던 음악은 사그라 들었지만 저 밑에선 아직도 드럼이 둔탁하게 울린다. 고개를 내밀어 밑을 살피니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빵빵 소리를 낸다. 삼호빌딩 옥상에 앉아 바라봤던 그 거리의 모습이다. 입에서 이상한 게 흘러 손으로 닦아낸다. 목이 졸려 흐른 침이 난간 밑 천길로 뚝, , 떨어진다. 으드득, 하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더니, 내가 앉은 난간 가장자리가 툭, 하고 무너진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밑으로 추락한다. 고도가 낮아질수록 음악 소리가 커져 곧 머리가 폭발할 듯한 굉음이 이어진다. 가장 세게 스네어를 몰아치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끊어져라 현을 튕긴다. 급기야 팽팽한 줄에 흠집이 나고, 가장 얇은 줄부터 하나씩 끊어지기 시작한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든든하게 버티던, 내 팔뚝보다 굵은 마지막 현이 반쯤 끊어져 건들거린다. 더러운 소리가 귓청을 때려 토가 나올 것 같다. , 하고 마지막 줄이 끊어지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거대한 소리가 난다. 땅에 부딪힌 내 머리가 땅콩처럼 박살이 난다.

 

눈썹 위로 머리를 잃었다. 쭈꾸미 볶음이 사방으로 튀어 흰 사분면이 붉게 물들었다. 모든 음악은 멈췄고, 뺨 위로 춘풍이 분다


강원도 #18 151101_강원도

#18

 

터미널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틀어 들어가니 식당들이 마주보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망설임 없이 중국집으로 들어간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규모가 상당하다. 홀이 꽤 넓고 격실도 대여섯 개나 있다. 엊그제 봤던 삼척 짜장면 맛집보다도 훨씬 큰 식당이다. 기대감이 높아진다. 삼선 짬뽕이 얼마냐고 종업원에게 물어 보지만 자리를 치우느라 바쁜 종업원은 묵묵부답이다. 카운터 쪽을 향해 좀 크게 소리쳐 삼선 짬뽕을 주문한다드디어 먹는 바닷가의 삼선 짬뽕이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 아빠는 화물차를 운전하셨다. 집 근처의 피혁 공장에서 짐을 받아 수출항이 있는 부산까지 운반하는 일을 정기적으로 하셨다. 아빠는 항상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시며 식대를 아꼈지만, 부산에서 일이 길어져 저녁을 먹고 출발하게 되는 경우에는 중국집에 가서 짬뽕으로 배를 채우고 대전으로 돌아 왔었다고 한다.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가족들과 짜장면을 시켜 기분을낼 때면, 아빠는 꼭 짬뽕을 시켜 먹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서 언제나 하는 말이, 이건 부산 짬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산에서는 삼선도 아닌 보통 짬뽕을 시켜도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 담겨 나온다고, 내륙에 있는 대전 같은 도시에서 쓰는 재료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었다. 내 상상 속에서 '바닷가 도시의 짬뽕'은 환상적인 맛을 가진 음식으로 각인되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짬뽕이 쟁반 위에 담겨 나온다.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 새우가 잔뜩 들어 있다. 오징어와 해삼은 꼬들꼬들하면서도 부드럽게 적당히 익었다. 뜨거운 국물에 살짝 데쳐진 청경채는 아삭함이 살아 있다. 홍합은 또 엄청시리 싱싱하다. 충대 앞 청해루에서 먹던 쪼그라든 홍합이 아니다. 홍합을 껍데기에서 빼 먹다가 국물을 후루룩 마신다. 바다 맛이 난다. 8천원의 값어치를 분명히 한다. 호강하는 느낌이 든다. 짬뽕이 마음을 위로한다. 코를 훌쩍거리며 정신 없이 짬뽕을 먹어치운다. 순식간에 면을 다 먹고, 남은 국물이 아쉬워 밥까지 말아 먹는다. 테이블 위에 빈 소주병이 두 병 놓인다. 그릇째 들어 남은 국물을 전부 들이키고 땀을 닦아 낸다. 얼굴이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오른다.  

 

소화 시키러 해수욕장까지 걸어가다 담배를 입에 물었더니 게욱질이 올라온다. 소주 두 병을 물 마시듯 들이킨 데다 밥까지 말아 돼지처럼 먹어 댔으니 당연한 일이다. 담배를 뱉어 버리고 걸쭉한 가래침을 뱉는다. 그냥 참을 걸 그랬나, 가래침을 뱉으며 역한 느낌이 더해져 토가 되어 올라온다. 으슥한 곳을 찾아 들어가려 했지만, 결국 해수욕장 어귀의 담벼락에 엉거주춤 서서 시원하게 토악질을 한다. 한 친구가 현실감 있게 흉내 내던 바로 그 토 소리가 난다. 올롤롤롤로롤롤. 뭔가를 많이 먹고 토할 때 나는 소리다. 세네 번에 걸쳐 속에 있는걸 게워낸다. 안압이 높아져서 눈도 같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토를 다 하고 나서 내가 토한 걸 보니 짬뽕 두 그릇 양은 된다. 속에서 면이 잔뜩 불었나 보다. 많이 먹긴 많이 먹었다.

 

술은 오르는데, 이대로 들어가긴 뭔가 아쉽다.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과 안줏거리를 사서 나온다. 언제나처럼, 새우탕과 크래미. 그리고 냉동 닭강정과 포카칩 한 봉지까지. 먹지도 못할 걸 잔뜩 산다. 편의점 알바 보기가 민망해 괜히 젓가락을두 개 달라고 한다. 몸에 힘을 빼고 봉지를 덜렁거리며 백사장까지 걸어가 비어 있는 벤치에 자리를 편다. 드문드문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부둥켜 안고 있는 커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저것들은 앤드로지너스인가... 뭐 저렇게 붙어 있어, 되도 않는 말을 혼자 주워섬긴다. 전부 게워냈지만 아직 체기가 남아있어 이번에는 천천히. 노래도 흥얼거려 보고, 비트박스도해 보고, 랩도 지껄이며 천천히. 소주가 혈액에 스며들어 끈적하게 굳어 가는 과정을 느끼려 해 본다. 소주가 가능한 한 긴 시간 동안 입 안에 머물 수 있게, 컵을 입에 댄 채로 조금씩, 조금씩 삼키며 맛을 음미한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마시고 싶었는데, 이렇게 마시니 오히려 훨씬 속도가 빠르다. 한 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새우탕은 두 젓가락인가 밖에 못 먹었다


좀 먹어야지. 저녁 안 먹었잖아. 속 버려. 미지근해진 컵라면에 크래미를 쪼개 면 속에 묻어 둔다. 다가닥, 소주를 또 따 종이컵에 반만 채워 들이킨다. 면발을 후루룩 삼키고, 국물에 젖은 크래미를 꺼내 먹는다. 달달하고 짭짤한 게 딱 내 입맛이다. 역시 새우탕에 크래미는 진리야. 짬뽕보다 낫지. 집을 나온 후 혼잣말이 부쩍 늘었다. 머리 속에 있는 말들이 그대로 튀어 나와 가끔 지레 당황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소주보다 새우탕이 먼저 없어졌다. 난 왜 이렇게 밸런스를 못 맞추지. -일런-. 영어 발음을 일부러 더 꽈 강조한다. 아돈 케 맨. 아저슷 워너 비 마셆 맨. 암 나로케. 암거나 킬마셆. 후쓰거나비 해-? 메이삐. 에뷔원 벗 미. 아돈노맨. 워너비 줴이 디, 딜러, 띨러. -라돈노 하으투 쥬뤔 맨. 암 저슷 어 캣. 뿨킹 카피캣. 유 워너비 구뤠잇? 유슛 주륑 디낄러. 낫 쏘주 라잌 미 맨


소주도 없어졌다.

 

한 시간 가량 앉아 있었나 보다. 엉덩이가 굳어서 먹먹하다. 봉지에 남은 닭강정과 과자를 주섬주섬 담아 챙기고, 빈 병과 쓰레기를 모아 해변가의 쓰레기통에 버린다. 숙소로 돌아가다 보니 리조트 뒷 편 공터에 야구 타격 연습장이 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걸음을 재촉한다. 배트를 쥐고 세 게임을 연달아 친다. 첫 번째 타격 때는 공이 하나도 못 맞춰서 몰랐는데, 두번째 게임 때 대여섯 개를 치고 나니 아까 숙소에서 들었던 깡깡거리는 소리가 뭐였는지 알 거 같다. 너도 내 잠의 오케스트라의 일부가 되었었구나. 헥헥거리며 동전을 다시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배트를 휘두른다.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것 같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계단을 내려온다.

 

편의점엔 물을 사러 들어갔었다. 그리고 아침에 술 때문에 힘들 것같아서 사이다도 사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 나온 내 손에는 맥주 피쳐와 소주 한 병이 든 봉지가 들려있다. 나더러 미친 놈이라고 하겠네. -쥐만 나는 미친 놈이 아닌 걸. 나는 그냥 비트를 만들고 싶어요. 방에 들어와 침대 위에 노트북을 펴 놓고 비트를 다듬는다. 어질어질해서 눈의 초점이 자꾸 어긋난다. 대충 대충 만지고 렌더링을 다시 한다. 마지막 곡을 다듬는데 토가 다시 올라온다.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머리를 쳐 박는다. 어우, 섞어 먹으면, 좆같애, 아주. 이 말을 마지막으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든다.


 

120525. 금요일

 

목이 말라 눈을 뜬다. 창문을 보니 푸른 빛이 하늘에서 새어 나와 어둠을 밝히고 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 들이킨 뒤, 의자 위로 올라가 천장에 달린 스프링쿨러에 허리띠를 걸어 매고 목에 감아 고정시킨 뒤 의자를 차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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