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에, 에취! 훌쩍, 캬아악, 퉤.
화장실이 좁아 퉤, 하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 온다. 코에 잔뜩 들은 콧물을 목으로 끌어내려 변기에 뱉는다. 아침부터 코가 말썽이다. 비염이 도진 것 같다. 처음엔 환절기에만 가끔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만성이 되어 버려 조금만 온도 차가 나도 금세 코를 훌쩍이게 됐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집을 나온 후 며칠이 지나가는데, 지난 며칠 동안은 전혀 증세가 없었으니 말이다. 화장지를 돌돌 말아 팽, 하고 코를 푼다. 변기에 화장지를 버리고 물을 내린다. 누런색 오줌물이 화장지를 빨아들이며 소용돌이 친다. 다시 코를 끌어모아 퉤, 하고 소용돌이 가운데에 뱉어 버린다. 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잔뜩 부어 있다. 누가 보면 밤새 생이별이라도 한 줄 알겠다. 에이, 그냥 선그라스를 살 걸 그랬어. 세면대 물을 틀어 얼굴을 닦아낸다. 찬물로 눈을 좀 식히고 싶었지만 물이 미지근하다. 다시 휴지를 뜯어 물을 닦아내며 목에 남은 흐릿한 자국을 흘낏거린다.
까페 앞에 나와 담배를 물고 선다.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가요가 재생된다. 오늘 밤 암 쏘 핫, 난 너무 뜨거워. 헤이 미스터, 헤이 시스터 저리 비켜줘. 뜨거,뜨거, 난 너무 뜨거워. 가슴 큰 지나의 노래네. 그런데 베이스를 어떻게 맞춰 놓은 건지 듣기 싫은 치찰음만 강조되어 들린다. 하이만 너무 크잖아. 이큐를 뭐 이렇게 맞춰 놨어. 듣기도 싫은 걸. 소리의 자리에서 한 걸음 비껴서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부은 눈두덩이가 무겁게 느껴진다. 해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 대기가 뜨거워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담배 연기가 입안의 수분을 전부 빨아들여 목이 탄다. 까페 안을 살피니 내 테이블 위에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다. 손가락으로 튕겨 담뱃불을 끄고 안에 들어가 앉는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다 결국 흘리고 만다. 커피가 목을 타고 흘러 옷으로 번진다.
카운터 앞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던 여주인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급하게 휴지를 챙겨다 준다. 사레가 심하게 들려 콜록거리는 나를 걱정하는 말을 건넨다. 기침을 몇 번 하니 눈이 빠질 것 같다. 혈압이 오르는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심호흡을 하며 초점 없는 눈으로 여주인의 입모양을 응시한다. 심장이 머리까지 올라왔는지, 박동 소리에 맞춰 뒤통수가 두근거린다. 시선이 흐릿해지고, 지나의 노래는 희끄무레 번져 리벌브 먹인 소리가 되어 머리 속에서 울린다. 지나의 큼지막한 가슴이 덜렁거린다.
"괜찮으세요?"
퍼뜩 정신이 든다. 눈이 풀렸었나 보다. 여주인이 허리를 굽혀 내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고 있다. 네, 아, 네, 괜찮아요, 당황 섞인 대답을 던지고 커피를 마저 닦아낸다. 코가 미지근하다 싶더니, 커피를 닦아낸 자리에 벌건 핏방울이 떨어져 스며든다.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어머, 어떡해, 여주인이 카운터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 내민다. 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웃으며 코피를 닦아낸다. 표정이 굳어졌지만 별일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대충 닦아내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휴지에 물을 적셔 코와 입 주위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낸다. 코에 박아 뒀던 휴지를 빼내니 시커먼 핏덩이가 휴지 끝에 딸려 나온다. 킁 하고 코를 푸는데 다시 코피가 터진다. 온갖 욕지기를 내뱉으며 한참동안 그렇게 화장실에서 지혈을 한다.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세수를 했는데도 여전히 찝찝하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여주인에게 괜찮다는 인사를 건네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또 일장 연설을 늘어 놓을까 싶어 바로 헤드폰을 쓰려 했는데, 타이밍이 좀 늦었다. 여자는 어느 새 앞자리에 앉아 말을 걸기 시작한다.
"오늘 안색이 너무 창백해 보여요.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얼굴도 좀 부은 것 같고, 코피까지 흘리시고."
"아... 아뇨, 오늘 비염이 좀 심하게 왔네요. 가끔 심한 날에 코피도 나고 그래요. 괜찮아요."
비염 핑계를 댄다. 사실은 내심 좀 걱정이 된다.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힌 게 뭐가 좀 잘못된 건지, 아침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더니 코피까지 난 거다. 젠장맞을 싸구려 허리띠 같으니.
"뭐... 많이 안좋으시면 약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비상약 통이 저기 있을 거에요."
"아니에요. 원래 편두통이 좀 있어서 진통제 가지고 다녀요. 그냥 찬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가방에서 약통을 꺼내 타이레놀과 코감기약을 한꺼번에 삼킨다. 이제 좀 나아지겠지. 물잔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 젖혀 기댄 채 눈을 감고 비트를 듣는다. 강렬한 첫째, 심오한 둘째를 거쳐 사랑스런 3번째 곡의 후반부로 넘어갈 즈음, 잠이 오기 시작한다. 오래 쓴 싸구려 이어폰의 접촉이 불안정해 간헐적으로 소리가 끊기듯, 뜨문뜨문 현실과 꿈을 오간다. 까페에서 잠을 자는 게 민폐 아닌가. 괜찮아. 손님도 없는데 뭐. 술을 또 그렇게 마셔댔고, 잠도 거의 못 잤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합리화한다. 가만. 그건 내 사정이잖아. 에이. 근데 이미 타이밍 지났어. 그냥 자야지. 작게나마 가지고 있던 불안감을 떨치고 나니 왔다갔다 하던 소리가 완전히 꺼진다.
희뿌연 배경에 지나의 커다란 가슴이 덜렁거리며 떠 다닌다. 꿈이니까 만져도 된다고 생각하며 손을 길게 뻗는다. 닿지 않는다. 약간 모자르다. 고개가 의자 목받이 뒤로 넘어가 버려서 아무리 용을 써도 바로 서지 않는다. 어깨를 돌려 한 손이라도 닿게 하려 한다. 저 풍만한 가슴을 꼭 만져보고 싶다. 꿈이니까 어깨가 좀 빠져도 상관 없을 것 같다. 무리해서 어깨를 우드득 돌려버린다. 물컹. 큰 가슴, 폭력적인 가슴이 손에 잡힌다. 내 큰 손바닥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아 손가락 사이로 넘쳐 흐른다. 그리고 부드럽다. 한없이 부드럽다. 우유에 적신 카스테라가 이런 느낌일까. 어우. 갑자기 들이닥친 자극에 놀라 팔을 움츠렸다가 다시 손을 뻗어 유선형의 더블유 사이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피부가 매끈하다. 오른쪽 가슴을 한 번 세게 움켜 쥐었다가, 곧 손가락에 힘을 빼고 손 끝으로 젖꼭지 주위를 간질인다. 손가락을 모아 젖꼭지를 살짝 꼬집는다. 토르소 뿐인 가슴이 움찔하는게 느껴진다. 가슴이 크게 출렁이며 파도를 만들고, 파도는 목 위로 울컥거리며 뻗어나가 쇄골과 목, 머리의 형상을 만든다. 선이 먼저 그려지고, 색이 더해진다. 음영이 더해지며 굴곡을 만든다. 갑자기 준모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돌리라고? 아니 새끼야. 처음에는 살살. 완급조절을 하라고. 약하게, 슬쩍 슬쩍, 그러다 강하게. 봐봐. 손을뻗어 막 나타난 목덜미 주위를 더듬는다. 올려묶은 머리 아래, 목 뒤의 잔털이 잔망스럽다. 피부에 닿지 않게, 허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살짝, 그러나 지그시 쓰다듬는다. 턱까지 닭살이 돋아 오르는 게 보인다. 목젖까지 내려온 손가락을 세워 쇄골을 간질이다가 뱅글뱅글 돌리는,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 아래로 점점 내려간다. 비옥한 풍요의 골짜기를 거쳐 다시 유선형의 더블유 사이까지 내려온다. 왼쪽으로 갈 듯, 오른쪽으로 갈 듯, 손가락이 좌우로 방향을 가리킨다. 무심한 듯, 실수인 듯, 손목께를 젖꼭지에 슬며시 부딪힌다. 움직임이 순간 패턴을 깨며 오른쪽 가슴을 덮친다. 하지만 쉽게 중심으로 향하진 않는다. 손가락은 젖꼭지를 둘러싼 선홍빛의 유륜 주위를 한참 동안 맴돈다. 배가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는다. 갓 생겨난 머리에 숨통이 트인 듯, 하악거리는 숨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젖꼭지를 스치며 재빨리, 이번엔 왼쪽 젖꼭지를 꼬집는다. 허리가 활처럼 휜다. 다시 한 번 가슴이 출렁이고, 이번에는 아래쪽으로 파도가 흐른다. 허리와 골반이 나타나고, 검은숲을 지나 쭉 뻗은 양 다리가 그려진다. 골반 뼈를 쓰다듬던 두 손을 뻗어 엉덩이를 급하게 움켜쥔다. 다시 한 번 허리가 휜다. 그 허리를 재빨리 낚아채 거칠게 내 무릎 위로 앉힌다. 꼿꼿이 선 내 위로 아늑한 다리가 부드럽게 벌어져 포개진다. 강렬한 자극에 이번엔 내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지그시 눈을 감고 삽입감을 만끽한다. 팔에 힘을 줘 천천히 허리를 돌린다. 내게 얹힌 몸은 움찔거리며 적극적으로 쾌감을 표현한다. 인위적이지 않은 그 움직임이 마음에 든다. 내 인도에 따라 흐르던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그 몸은 움직임을 멈춘 채 긴 숨을 내쉬며 호흡을 조절한다. 그리곤 이내 스스로의 의지로 격한 요분질을 시작한다. 짜릿한 쾌감이 세포 끝에서부터 시작된다. 애태웠던 전희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듯, 그 움직임은 일정한 패턴을 그리는가 싶다가 순간 허를 찌른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색다른 자극이 척추를 타고 쌓이는 느낌이다. 애태우기를 포기한 허리놀림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이내 그 자극은 뒤통수까지 차 올라 목뼈 끝, 제비초리 바로 및 움푹한 부분에까지 와 닿는다. 순간 머리가 쨍 하고 얼어붙는다. 통증이 부딪혀 주위 장기들로 번져나간다. 하지만 아직 척추에 남은 그 쾌감의 물결을 포기할 순 없다. 뒤통수를 넘어서면 고통이 일어 달콤한 그 자극이 영영 사라질까 무섭다. 템포를 좀 늦춰 오랫동안 즐기고 싶지만, 쾌감에 미친 이 몸뚱아리는미친 듯이 달릴 줄만 안다. 살이 쓸리고 허리에 고통이 인다. 아썅. 부러지겠다고. 허리를 잡아 세우려 손을 대는데, 손을 대는 지점부터 무채색으로 사그러들기 시작한다. 터질 듯 생기롭던 탄탄한 피부도 탄력을 잃고 쭈글쭈글 미농지처럼 아스라진다. 나를 꽉 물고 흔들던 긴장이 사라진다. 이제 선만 남은 그 몸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만, 더 이상 마찰이일지 않는다. 색이 옅어지며 조금씩 모래처럼 이리저리 흩날려 사라진다.
익숙한 패턴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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