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102 / 토요일 / 보라색, 자(紫), Purple 151220_무지개

160102 / 토요일 / 보라색, (), Purple

 

내게 배인 우울은, 관자놀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1.

 

'세로토닌 분비 억제'라는생물학적 원인이 밝혀졌다고는 하나 약물을 통해 이를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증세가 '일시적으로 호전' 되는 것 뿐, 완치라는 개념은 없다. 자율신경계의 부조화, 세타파 과다 생성 등의 개념 역시 증상을 ''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장치들일 뿐, 치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생물학적 접근은 치료법보다는진단을 위한 방법일 수 있겠다. 환경적 요인이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모든 역경과 재수를 이기고 난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미소 뒤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숨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말하는 역경과 재수는 미담을 만들기 위한장치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환경이 나아진다고 해서 욕망이 줄어들진 않기 때문이다.

 

#2.

 

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영혼에 숨어든 악령'(혹은 악마) 라는 존재로 표현한다.기가 막힌 대입이다. 인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현상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며 '다 그분이 알아서 해 주실 거야 임마 짜식아. 너 요나 알아? 아브라함 알아?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게 그들의 특기이니 말이다. 과학과 욕망은 서로 선형을이루며 함께 발달해 나간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항상 그렇듯, 그 방향이 같을 수 있어도 속도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과학은절대 욕망을 따라잡지 못한다. 채워지지 못한 욕망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다시 우울을 낳는다. 과학과 욕망, 그 속도의 차이가 종교의 설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고도말할 수 있다.

 

#3.

 

대개는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을 때 시작된다. 공부, , 사랑, 열정, 어떤 것이든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나마 대안을 찾아볼 수 있는것들은 적어도 (사회 통념상) 1년 이상 이루지 못한 상태가이어졌을 경우에 시작된다. 감정적인 것으로부터의 절망은 훨씬 빠르고 크게 우울을 동반한다. 대안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거래에서채무가 발생되는 순간 우울은 시작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채무자보다채권자에게서 더 흔히 나타난다. 감정은 언제나 더 준 사람이 죄인이니까.)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대안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제 우울은 한 단계 더 성장한다. 절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포기로무의식에 자리잡는다. 다른 인식의 발달 과정과 마찬가지로, 우울은이제 '우울을 위한 우울'을 낳기 시작한다. 작은 것은 점점 커지고 큰 것은 순식간에 작아진다. 시각은 좁아지고짧아진다. 앞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며 뒤만 생각하게 된다. 출근길에마주친 비둘기 한 마리가 한 순간에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리기도 하고, 3년 전에 자살을 생각했던 이유에대해 끝없이 집착해 일과 일상을 망치기도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미래는 남의 일로 느껴진다. 아니, 모든 것이 남의 일로 느껴진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내 평생(하루만 사는 사람이 되었으니)을 좌우할 이정표가 된다. 염세가 다가온 것이다.

 

면역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 희망, 미래, 열정 같은단어들은 내다 버린 지 오래다. 처음에는 내 고통과 주변인의 슬픔을 저울질한다. '나는 이미 가치가 없어, 날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야.' 정말 가까운 사람들에겐 슬쩍 고백을 하기도 하고 의견을 묻기도 한다. 무의식중에라도  이렇게 자기의 존재를증명 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나마 구원을 원하는 사람일 수 있다. 물리적인 상황으로 인해 이런 대화조차나눌 수 없거나, 애초부터 구원 따윈 바라지 않을 만큼 깊게 간 이들은 혼자 모든 결론을 내린다. 고통이 더 크다고 결론을 내리면, 진지하게 죽음의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비겁하게 보일 지 모르지만, 덜 아프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비겁하게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큰 이유에서 시작된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이제는 왜였는지 조차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4.

 

가장 쉬운 방법은 투신이다. 딱딱한 콘크리트보단 물렁한 물을 택한다. 한강 다리에서는 오늘도 10명 이상이 줄 없는 번지점프를 한다. 한강 구조대의 통계에 의하면 반반의 확률이다. 요령과 돈이 있는사람들은 약을 구한다. 수면제야 뭐 당장이라도 정신과에 가면 한 번에 스무 개 이상을 처방 받을 수있고(이 스테이지까지 도달한 대부분의 이들은 이미 서랍 한 가득 가지고 있을 것이고), 청산가리나 모르핀 같은 극약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다. 요령이있다면 말이다. 고소 공포가 있는 이들은 손목을 그으려 하고, 첨단공포가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목을 맨다. 만약 고소 공포증이 있는 누군가가 높은 건물에서 투신해죽었다면, 그 죽음만큼은 비웃지 말아야 한다. 삶의 고통이공포를 이겨낼 만큼 컸던 것이니.

 

마지막 과정은 합리화다. 자살자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안고 가는 경우는없다. 삶을 부정하고, 죽음을 합리화한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지 모든 이유를 동원해 설명한다.그 산물이 유서다. 청자를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화자스스로가 납득하기 위해서다. 더군다나 생의 욕구를 가진 사람들은 대개 자살자의 유서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 이유를 깎아 내리며 비웃기까지 한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가 아니라 '고작 그걸로.' 라고여긴다. 불과 물의 관계다. 불은 물을 끓여낼 수 있지만물은 불을 꺼트리기만 한다. 사는 사람들은 죽고자 하는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그 불이 꺼지기 전이라도 말이다. 뭉뚱그려 관념적인 대안만을 제시하거나 ('다 잘 될 거야.' ) 더큰(혹은 더 크다고 생각하는) 고통을 예로 들며 자살자의고통을 칭얼거림 정도로 ('얌마 형이 니 나이때는 어땠는지 알어?' ) 업신여긴다. 그래. 너는그런 뜻이 아니었겠지만 당사자의 무의식에게는 확실히 그렇다. 유서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미안해요.' '슬픔을주게 돼서 미안해요.' 이기도 하지만 '이깐 일로 이래 놔서미안해요.' 라는 뜻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사과는 항복이아닌 포기를 선언하는 말이기도 하다. '미안해요. 다시는안 그럴게요.' 라는 뜻이 아니라 '미안하다잖아, 그래서 뭐.' 의 뜻이라는 말이다.

 

#5.

 

마지막 단계에까지 도달했다가 우연히 돌아오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디데이날 깡패를 만나 약 봉지를 빼앗겼다던지, 싸구려 허리띠가 끊어졌다던지 하는 이유로 말이다. 이런 사람들 중 대부분은 눈 밑이 퀭 해진 채로 호시탐탐 다시 기회를 엿본다.물론 어떤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을 받아 다시 삶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부지 말고.' 라고세뇌시키며 욕망의 기준을 조절하기도 하고, 나아가 생에 사명을 부여해 삶의 전도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이 남긴 다크 서클은 연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다.치유 내지는 망각을 위해 택한 열정은 금세 명분을 잃는다. 억지로 부여한 의미는 곧 빤쓰까지벗겨져 알몸이 되고, 그 초라함을 목도한 순간 유혹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눈 밑에 치덕치덕 발라뒀던 비비가 벗겨지면, 삶의 이유를 대기 위해상대적이었던 가치 교환은 단숨에 절대적인 것과의 비교로 전환된다. '그래. 그래도 3억 빚보단 8천빚이 낫잖아. 걸어 다니는 것 보단 버스라도 타는 게 낫잖아.' 하던것이 어느 순간 '에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살아야 하나.' . 전자는 그 비교의 대상이 무한대인 반면 후자는 딱 한 가지다. .

이제 이 사람에게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다. 두렵지도, 피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늘 곁에 있는 존재다. 우울은 만성이 됐고 자극의 크고 작음도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는처음처럼 거창하게 계획도 하지 않는다. 이미 내 숨을 끊는 방법에 대해서는 선수가 다 됐으니까. 그냥 툭, 이쑤시개를 부러뜨리듯 쉽게 갈 수 있다. 수백 번, 수천 번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끝냈고, 실제 시도에서 뭐가 부족했었는지도 알고 있다. 콜라를 닦아낸 수건에붙은 개미를 털어내듯, 그냥 툭.

 

삶과 죽음을 동시에 껴안고 산다. 이제는 삶을 위해 억지로 세뇌하지도, 죽음을 위해 우울로 파고들지도 않는다. 그냥, 양 팔에 껴안은 채 '살고' 있는것이다. 생각해 보니 '공간의 문제'도 이게 원인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가아니라, 혹시라도 스위치가 꺼졌을 때의 어둠을 감당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기인지 이타인지는 아직도 판단할 수 없다. 정의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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